가톨릭/묵상

20210310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 18,21-35

임탁 2021. 3. 10. 09:29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를 바라신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발견해야 한다.

그가 '어떻게' 또 '왜' 만 탈렌트를 빚지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주었다.
사실 관계로만 보면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만 탈렌트에서 백 데나리온을 빌려줬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 것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원래 '남의 것'을 자기 이름으로 빌려줬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만 탈렌트를 탕감받는다.
세법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탕감받았다는 건 사실 그가 그만큼의 것을 받았다는 말 아닌가?
만 탈렌트라는 엄청난 부를 받은 것이다. 그에 비하면 백 데나리온은 무의미한 숫자다.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을 빌미로 그는 타인을 억압한다.
어쩌면 이제 온전히 자기 것이 된 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부를 준 임금의 의지가 아니다.
임금은 부를 준 것이 아니라 '용서'를 준 것이다.
따라서 그가 다른 이의 채무를 탕감해주는 것은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마음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성찰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잘해서 그 부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절대 아닌데.

사실 우리에게 엄청난 상처와 아픔,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할 기회는 많지 않다.
그 부분은 차라리 신비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소한(백 데나리온과 같이 무의미한) 용서를 해야할 순간들은 의외로 많다.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는 '조건'을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곧 내가 스스로 얻어낸 '조건'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왜 그 '조건'을 주셨는가?
나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그 '마음'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이것이 가능해질 때, 우리는 타인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