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코로나와 여러 사회적 어려움 속에 교회 안팎의 고통 받는 많은 분들이 신부님들 기도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저희는 신부님들의 삶 안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앙적 고민과 갈등속에서 희망을 확신하며
저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오고 있습니 다. 저희는 오랜 시간 교회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기에 나름대로 신앙심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저희 부부는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조그마한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내의 활동과 봉사만을 근거로 신앙심을 평가한다면, 저희 부부는 그래도 중간 정도에는 해당한다고 감히 자평도 합니다. 저희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기에 저희 생각과 행동 안에 교회의 많은 가르침이 생활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부는 교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오면서 교회공동체를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자랑스럽기도 했고 혹은 실망과 좌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국사회 내에서 교회의 존재조차 희미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대학을 다니고 청년이었던 시기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우리 사회공동체의 어려운 문제와 고통받는 이들의 대변인이었고 보호자였으며 시대의 등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단은 저희가 신앙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버팀목이었으며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교육, 복지, 여성, 노동 등 아주 많은 분야에서 교회가 활동하는 모든 것을 포함해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교회공동체의 상징이었으며 시대의 등불이었다고 저희는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사제단이 창립되고 아주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제단 창립 당시 독특했던 사회공동체의 회개와 변화를 위한 모든 노력 방법과 행동 양식이 최근에는 시민사회 여러 단체와 교회 내의 사제들이 일상적으로 활동하는 방식으로 보편화 되었다고 저희는 느끼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변화이며 하느님의 신비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쯤에서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제단 활동을 포함해서 신앙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의 대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믿을 교리만으로 교회가 공동체 구성원을 설득하거나 교회의 상징을 만들 수 없다고 저희는 확신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톨릭이 존중받고 신부님들이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 이유를 개신교에서 분석하고 연구한 사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가 사제단의 활동, 둘째 사제와 수도자들의 독신 생활, 셋째 김수환 추기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공동체가 사회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해 스스로 헌신하며 고통을 감수하고 이를 추진하는 지도자가 있고, 교회공동체의 지도자들인 성직자들의 생활이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공동체는 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를 하루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저희가 교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생각하는 몇 가지 생각과 대안을 신부님들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을 우선 해야 합니다. 특히 코로나19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이에게 구원과 인간다운 삶을 개방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이를 실천과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 구성원 누구나 공감하고 확신하는 내용입니다. 주교님들은 사목 교서나 강론에서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늘 주장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특히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사회적 어려움은 모두가 알고 있으며 앞으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은 현상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 그 내면적 이유와 구체적 실천과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신자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라는 정도입니다. 교회가 적극적으로 이 어려운 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그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국가와 사회공동체에 고통을 분담하도록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는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많은 혜택과 사랑을 받았습 니다. 지금은 사회공동체로부터 받은 사랑과 물질적 자원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범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사회적 자원과 재산 분배의 방법과 원칙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우리 교회공동체는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성직자들을 포함해서 무수히 많은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사회공동체의 어려운 문제나 필요한 방안을 고민하고 이에 응답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자문과 교회의 대안 제시는 한국사회를 더욱더 풍요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공동체는 민주화, 노동자, 농민 등 사회공동체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대안을 찾으려 노력하고 헌신했던 아름다운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그 빛나는 전승조차 무시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정부가 요구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동참하는 것으로 교회의 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소극적이며 비복음적 행태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작은 이들에게 교회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예수님 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사회공동체의 재 산과 자원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안 을 마련하고 그 실천 방안을 공개적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늘 현장을 찾아다니며 쉬운 비유로 설명하시고 작은 이들을 도우셨습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은 현장감이 너무 없으며 도식적이고 의례적입니다.
미사에는 많은 분들이 참여합니다. 전례에 참여하고 신부님의 강론을 듣습니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하기도 하고 교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토대를 만드는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사 때마다 저희 부부는 신부님들의 강론에서 많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고민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기 어려운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우연히 TV 인문학 강좌 중에 어느 목사님께서 강의한 마태오 복음 해설을 들었습니다. 그때 제 아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게 건넨 한마디가 지금까지 제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여보, 왜 우리 신부님들은 저 목사님처럼 복음을 생활 속에 실천할 수 있도록 쉽고 이해가 가도록 해설하지 못하시지요?”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신자들이 직접 성당에 갈 수 없으니 모두 평화방송을 통해 미사를 체험하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게 되었습니다. 방송을 접하게 된 신자분들은 평소와 다르게 주교님들을 방송 미사에서 만나니 기쁜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방송 미사 후에는 아주 실망했다고 합니다. 미사는 아주 성의 없이 진행되었으며 강론은 듣기조차 민망했다고 합니다. 저희 부부가 목사님과 신부님들의 강론을 비교했던 때보다 더욱 마음 아픈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주교님들은 교회공동체의 상징입니다. 한국사회 공동체는 김수환 추기경으로 대표되는 우리 교회공동체의 메시지에 늘 주목했습니다. 부활 과 성탄을 맞아 발표한 최근의 전국 교구장님들의 메시지를 전국의 수천 명 신부님들이 한 번 읽어 보시도록 부탁드립니다. 몇 분의 주교님들을 제외하면 메시지의 목적과 내용이 무슨 말씀을 전하려 하는 것인지, 지금 우리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를 향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구체성도 떨어지고 시의성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글들이었습니다.
물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이 그 목사님만큼 성서에 대해 잘 알고 계시며 예수님의 실천적 행적 또한 충분히 이해하고, 개신교 목사님처럼 강의하고 해석할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계심을 저희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실제 강론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무엇을 어떻게 말씀을 전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 고민이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신부님들에게 강론을 위해 고민하고 삶에 필요한 방안을 신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자들은 대부분 주일미사를 참석합니다. 고단한 일상에도 쉬지 않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미사가 일상이지만, 신자들은 1주일에 하루 1시간 정도를 위해 준비하고 새로워지기 위해 미사에 참석합니다. 성당마다 차이는 있지만 적게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수천 명입니다. 그 많은 분들이 신부님의 강론을 양식으로 삼기 위해 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별로 고민 없이 아주 쉽게 의무적으로 하는 강론이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성서를 보면서 고민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살펴보고, 사회의 법과 제도와 역사를 이해하면서 강론을 준비하고, 그 내용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설명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신부님들은 아셔야 합니다.
교회는 사주가 있는 회사가 아닙니다. 신부님들은 은행처럼 일시적으로 책임을 맡은 은행의 지점장들이 아닙니다. 주교님들에게 예속된 사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특별히 성별된 직무에 참여하는 분들입니다.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신앙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며 그렇게 살겠다고 서약하고 서품을 받은 것입니다. 조직에 예속된 직장인, 또는 한 단체의 관리인이 아닌,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제로서 생활하고 의무를 다하는 신부님들이 되시기를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이는 어느 한 사제의 노력으로 성과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제들이 제단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 드린 약속과 결심을 상기하고 신앙공동체의 목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교회 내의 분위기를 만들고 지속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3. 교회 방송과 신문 등 언론을 획기적으로 개혁하여 사회공동체를 위한 도구로 활용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가 언론을 운영하는 양태를 보면 그 책임자인 주교님과 신부님들은 교회 언론의 필요성과 창간의 역사와 의미를 모르거나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화신문과 방송 창간은 독재 시기 언론 탄압에 대한 신부님들의 헌신과 고뇌의 산물이었습니다. 언론은 권력자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 사회공동체의 공의를 모으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독재 시기 권력자들은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정의가 공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언론인들을 억압하고 신문과 방송을 독재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심지어 독재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탄압하는 도구로 언론을 격하시켰습니다. 민주화와 사회 정의를 위해 투신했던 신부님들은 언론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교회가 직접 사회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소명으로 평화신문과 방송을 창립했습니다. 한국사회 공동체를 위해 언론 본연의 모습을 정립하기 위해 스스로 언론사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언론의 필요성에 주목했던 신부님들의 뜻을 실천했다면 우리 사회공동체를 위한 교회의 투신은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언론은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는 그저 소모품, 장식에 불과 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 인건비를 지급하고 건물과 장비를 유지합니다. 구독률, 청취율 모두 최악입니다. 신자들조차 잘 보지 않습니다. 보고, 듣고, 읽어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가 목적이라 해도 실패한 것입니다. 다른 종교방송과 비교해도 참으로 부끄럽고 마음이 아픈 상황입니다. 신문과 방송은 예언자적 선포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 내에는 예언자적 삶을 살아온 분들과 또 언론, 방송 전문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예언자적 선지자들과 또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그분들의 지혜와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한국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전승이기도 합니다. 독재 시기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은 한국사회 민주화를 위해 여러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언론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제대로 된 방향조차 설정하지 않은 채, 그저 연차에 맞는 사제들을 회장, 사장, 임원으로 발령 내고 우격다짐으로 운영하는 신문과 방송은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에 무익할 뿐입니다. 교회 내의 언론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전문가를 영입하고 교구와 사제들은 수천 년 이어온 교회의 가르침을 언론을 통해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조언하고 자문하는 지원자, 공여자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교회공동체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청소년을 포함한 성인들의 교육 교재로 새로이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는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헌신이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겠다고 세례를 받고 믿을 교리를 그저 지키려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 엄혹한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한 신앙공동체를 체험했던 신앙인들이 몸과 마음을 바친 헌신의 고백이 교회의 토대라고 저희는 배우고 읽었습니다. 한국사회 민주주의 원형을 연구한 한 학자는 박해 당시 교회공동체가 그 원형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삶은 그래서 저희 부부의 신앙생활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대학을 다니던 청년 시절의 교회는 그 순교자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한국사회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임을 확인하면서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을 가졌습니다. 한국사회 공동체는 이런 면에서 우리 교회공동체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는 일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왜 가난한지, 왜 억압을 받는지 그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신부님들은 가르치셨습니다. 교회와 사제단은 그러한 일을 통해 엄혹하고 무서운 시기에 두려움을 극복하며 사회공동체에 희망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제단 신부님들을 포함한 이러한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의 행적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의 역사와 교회 성인들의 행적은 중요한 전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지역 교회의 역사와 그 지역 사회공동체의 역사 또한 교회가 품고 가르치고 전승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한국교회 공동체의 특수성이 교회사 안에서 살아날 때 우리 교회공동체는 더욱 풍요롭게 성화할 것입니다.
5. 교회 조직 운영이 너무 폐쇄적이고 독단적이며 비효율적입니다.
조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집단이라고 합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직에 참여하고 법과 규정을 만들고 많은 이들의 합의를 도출하고 확인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도 세계적인 공동체로서 역할을 위해 많은 법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그 많은 법과 제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신앙인으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 교회공동체는 너무 폐쇄적이고 독단적이며 억압적입니다. 너무 많은 권한이 한 곳에 집중되면 독재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제도는 전형적인 독재체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공동체는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특수성이 인정되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 운영 방식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운영의 최소 단위인 본당공동체가 폐쇄적이고 독단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은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권과 지방자치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원형을 우리 교회제도에 있다고 소개합니다. 한국사회 또한 지방분권을 기초로 민주화에 대한 많은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본당공동체는 얼마든지 개방적, 집단적, 효율적 운영이 가능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어릴 때 다니던 주일학교와 교회공동체 기억이 여전히 잘 보존된 지금의 교회를 보면서 이제는 좀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본당을 책임진 사제가 사제로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본당 운영은 권한이 넓게 분산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교구장 중심의 교구운영을 본당 중심으로 운영방식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본당사제가 교구와 교구장의 명령을 이행하는 조직 관리 수단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순명하며 본당공동체 구성원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수천여명의 신자들을 이끌고 관리하는 본당사제의 책임과 업무의 양도 줄여야 합니다. 기능적이며 일상적인 관리는 신자들에게 그 역할을 분산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공동체의 재산은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물질적인 재산이 아닙니다.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 공동의 재산이라는 공익적인 가치관이 필요하며 소유권에 기인한 재산형성과 부를 축적하는 자본가의 축적 방식을 탈피해야 합니다.
6. 사제들의 삶이 신앙공동체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절제와 검소한 생활이 필요합니다.
성직자들이 독신 생활하는 삶의 방식이 사회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신뢰의 근원이 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이해관계자로서 경제적 이익에 민감한 현대 사회 생활과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와 존경이 포함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로서 삶을 서약하는 순간 세속적인 즐거움을 단절하겠다는 결단이라고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그 결단의 삶이 신뢰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실제 삶의 방식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과 다르다면 그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자기 절제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교구장 전용차였던 스텔라가 고속도로에서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을 모시던 기사분이 “추기경님, 이제 차가 너무 오래되어 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좀 좋은 차로 바꾸시는 게 좋겠습니다”하고 건의를 드렸더니, 추기경님께서 “그렇지, 나도 좋은 차를 타고 싶은데 내가 에쿠스를 타면 젊은 신부들은 외제차를 타려 할 거야, 모두를 위해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해.” 결국 2,000CC 승용차로 교체했습니다. 추기경님이 은퇴하신 후에 어느 날 교구청을 지나다 보니까 주교님들 차가 그랜저로 얼마 후에 에쿠스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차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로서의 삶에 대한 자신의 약속과 각오를 서품 때 다짐했던 그 순간처럼 다지며 살고 있는지 의문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은 저희 부부와는 다른 삶을 약속하셨고, 그 때문에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존경과 감사를 받습니다. 그 헌신의 삶을 보면서 저희 부부는 교회공동체 구성원으로 때로는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 늘 스스로 저희의 삶을 돌아보고 다짐하며 자긍심과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사제들의 모습에서 저희는 권위와 오만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교구장으로서 주교로서 조직을 관리하고 사제들을 호통치고 보직과 직위를 담보로 통제권을 행사하는 전근대적인 재벌 사주를 연상하게 됩니다. 세상과 사회 현상의 빠른 변화 속에서, 무지한 본당사제들이 제의와 수단을 무기로 신자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면 이제는 교회를 그만 다녀야겠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희가 아는 한, 주교님과 신부님들의 권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행과 돌아가심을 수락한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를 위해, 교회공동체와 사회공동체를 위해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헌신의 삶이 권위의 상징이며 우러러 나는 존경심의 바탕입니다.
지금 사제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당과 교구 각 기관에 배치되고 이후 그 삶은 모든 것이 보장된 일상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정년과 노후의 삶이 보장된 사제로서 수천여명의 신자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교구가 운영하는 병원, 학교, 단체, 본당 심지어 교구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성직자들이 고민할 수 있겠습니까?
1981년 10월 19일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여의도 광장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강론을 통해 성직자들과 신자들을 향해 어느 여성 노동자가 “한국 교회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셨는데 방부제가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인용하시면서 “이 사회를 밝히는 빛과 이 사회를 변혁하는 누룩의 구실을 하고 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고 하셨습니다.
40년 전 말씀입니다. 광주의 비극 그 참상 앞에서 당시 교회공동체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활동하시던 신부님들을 제외하면 참으로 마음 아픈 갈등이 내재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공동체를 위해 변화하라고 호소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 교회공동체의 주교님들은 직무를 태만히 하고 있으며 너무 무감각하고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안주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직자들은 그러한 주교님들을 따라 살고 그분들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조금씩 서로 불편하고 갈등이 존재해야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 교회가 세상에 필요한지 의문을 갖게 됩 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끊임없이 갈등과 분란을 만들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시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왜, 주교가 되고, 사제가 되었는지 저희 부부는 묻고 싶습니다.
“너의 집과 고향을 떠나라!”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아브라함과 “세상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던 초기 교회 제자들의 모습을 모든 성직자들이 기억하고 실천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40여 년간 저희가 보고 느꼈던 교회공동체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씀드렸습니다. 저희의 이 고백과 호소가 신부님들께 불편을 드렸지만, 그래도 보약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윤 프란치스코와 권 수 산나 부부가 드립니다.)
출처: 빛두레, 선포와 봉사 2020년 가-5(통권 제132권), 2020, 6-18쪽.
주소: gaspi.org/bbs/zboard.php?id=kerygma2007gaspi.org/bbs/view.php?id=kerygma2007&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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