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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사제생활의 길잡이

머리말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덕을 증진시키기 위해 흔히 遵主聖範(Liber de imitatione Christi)을 추천하듯이, 사제들의 성덕을 쇄신하고 신장시키기 위해 Claudius Arvisenet의 「사제 생활의 길잡이」(Memoriale vitae sacerdotatis)를 천거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이 책은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나 성서 그리고 거룩한 교부들의 작품을 뛰어난 필치로 인용하고, 이들 정신과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비록 소품이지만 뛰어난 보고로 가득한 이 작품을 읽는 사람은 당연히 이 책을 칭찬할 것이다. 그래서 성청의 검열관들도 이 책을 인가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와 함께 가자」(Vade mecum)고 부르는 듯한 이 신심서를 통해 사제는 의로우나 더 의롭게 되고, 거룩하나 더 더룩하게 되며, 깨끗하나 더 깨끗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묵시록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카롤로 보로메로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성 이냐시오를 손꼽았다(제86장 1 참조). Claudius Arvisenet가 이렇게 높은 덕을 추구하는 사제들에게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하여 좋은 신심 서적들을 추천하였으나(제88장 9 참조), 나는(D. Feller) 사제 생활을 더 거룩하게 하려고 힘쓰는 사제들에게 이 「사제 생활의 길잡이」를 추천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제들의 어떤 수도 공동체가 준주성범을 읽는 관습대로 점심식사 후에 이 책을 몇 줄 혹은 몇 절씩 읽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고전적이며 새로운 것들을 자기의 보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 사제의 영성을 두루 갖춘 저자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트레스(Trecensis) 교구 총대리이며 의전 사제(Canonicus)인 D. Feller가 대전기(大傳記)에서 전한 바에 의하면 Claudius Arvisenet는 1755년 9월 8일 링고(Lingo)에서 태어났고, 1831년 2월 17일 브르군디아(Brugundia)의 그라이오(Graio)에서 선종했다. 신학 전공을 마치고 사제가 된 후 뛰어난 재질과 대단한 신심을 인정받아 자기 주교 Laluzerne(후에 S.R.E 추기경)에 의해 Lingo 교구의 의전 사제(Canonicus)와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이 총대리 제도는 18세기 초 프랑스의 불행한 소요(대혁명)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791년 프랑스 성직자에 대한 공민헌장(公民憲章)에 따라 박해자들이 이교적 맹세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조국에서 스위스의 루체르(Lucer) 지역으로 주교와 함께 망명갔다. 그는 그곳에서도 시간을 허송치 않으려고 아니,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 유익한 생활이 되게 하려고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며 생활하였다. 그 당시 이 소품도 저술되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야 출판되었다.* 이 소품이 출판되자 온 유럽에 널리 퍼졌고, 그는 이 소품을 「사제 생활의 길잡이」(Memoriale vitae sacerdotatis)라 이름하였다. 교황청과 비오 7세는 이 소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뛰어난 이론과 아름다운 문체 때문에 오늘 우리 시대까지 여러 곳에서 거듭 출판되어 오고 있다.
  프랑스의 교회가 평화를 되찾자 트레스의 La Tour-du-Pin 주교가 Cl. Arvisenet을 1803년 다시 총대리와 의전 사제로 임명하고 또 총대리로서 주교회의에 참석하기를 원하였다. 그 후계 주교들도 그에게 같은 명칭과 직무를 계속 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수도(修道) 공동체들을 맡아 열심히 관리토록 했다. 또 적지 않은 신자들이 교회 법정에서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중병이 들어 점점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서 그라이오로 가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한 사제로서 신심이 뛰어낫으며, 예술에 대한 이해와 영혼들의 사목에 정통한 지식을 가졌었고, 빈자들을 구하는데 지대한 열성과 사랑을 베풀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그는 각계각층의 신자들을 신심생활에로 이끌며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일부는 먼저 라틴어로 썼다가 후에 자기가 직접 프랑스어로 옮기기도 했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을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다니 12,3)

* Cl. Arvisenet는 자기 작품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같은 프랑스 사제들에게 봉헌하고 각계각층에 속한 그들을 열심으로 지도했다. 배교나 독성적 맹세를 거부하고 그러한 큰 죄악과 불경을 저지르기 보다는 슬픔과 불편을 감수하며 유배를 떠난 이들을 칭찬했다. 생명에 대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덕행으로 신자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려 남아 있던 분들에 대해 경탄해 마지 않았다. 또 처음에 이교에 빠졌다가 뉘우친 회개자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교에 머물러 있어서 자모이신 교회가 회개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퍽 슬퍼했고, 전투에서 용감하여 독성으로 더렵혀지기 보다는 차라리 칼 아래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찬양하였다. 마침내 주님의 포도밭으로 돌아온 모든 동료 사제들을 천상의 은총에 순응하도록 위로하며 말하기를 "귀양살이 중에 쓴 이 소품을 그들에게 봉헌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의 말이 횃불처럼 타고 덕해으이 도화선이 되고 성덕의 채찍이 될 수 있기를 열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