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났던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준다.
직접 만나지 못한 토마스 사도는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자 자신이 요구했던 기준과 상관없이 그분을 주님이자 하느님으로 고백한다.
이 과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이에게 전해준다.
그는 믿지 못하지만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나면 믿게 된다.
다시 그가 다른 이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해준다. (반복)
여기서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미 중요한 것이고 이미 좋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자 노력한다면 '메신저'가 좋아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치 전략(?) 중에,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라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걸 응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메시지를 더 좋게 바꿀 수 없다면 메신저를 더 좋게 바꾸자."
메신저를 바꾼다는 것은 내가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변화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된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추구할 때, 일상에서의 작은 체험들이 나를 점점 변화시켜준다.
변화된 나는 예수님과의 더 깊은 만남,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체험하게 되고
다시 그 만남과 이해는 나를 더 변화시켜준다.
이런 선순환을 통해 우리는 오메가 포인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선순환'이 기도에 기반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싶다.
여기서 '함께'라는 말은 시공간적으로 같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지가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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