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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1주차) 교황 비오 9세

교황 비오 9세[각주:1]

 교황 비오 9세의 본명은 Giovanni Maria Mastai-Ferretti(1792~1878)로, 처음부터 유력한 교황 후보자는 아니었다. 사실 그레고리오 16세의 체제에서 탈피하려는 이들에 의해 교황 후보자로 갑자기 부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황이 된 비오 9세(1846~1878)의 성품은 유쾌하고 상냥했지만, 당시의 정황에 적절하지 못했던 미숙한 정치력과 외교력, 경제적 위기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문제에 부딪혔다.

 프랑스 혁명(1787~1799년)은 유럽 전역에서 독립 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보수주의자였던 비오 9세는 초기에 자유주의적·애국주의적 노선을 택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았다. 칙서 Qui pluribus를 통해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원리들을 갱신하고(1846년 11월 9일) 러시아와는 정교 협정을 맺었고(1847년 8월) 오토만 제국과의 협상으로 예루살렘에 라틴계 총대주교좌를 세우는 등(1847년 10월)의 활동들로 이탈리아에서의 교황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1848년 혁명운동들이 유럽을 뒤흔들고 이탈리아 역시 해방을 위한 對오스트리아 전쟁을 계획했으나 비오 9세는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로 교황청 수상이었던 Rossi가 급진세력에게 살해되고(1848년 11월 15일) 비오 9세는 나폴리 왕국의 가에타로 피신했다. 그 사이 로마에서는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1849년 2월 8일), 교황은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1850년 4월 12일). 하지만 1860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졌고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로 1천 년간 존속되어 왔던 교황령은 끝을 맺었다. 이에 교황은 이탈리아 정부가 제시하는 ‘보장법’(1871년) 등 모든 화해의 시도를 거부하며 스스로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했다. 이 갈등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다. 교황령의 종말로 교황은 외적·정치적 세력을 잃은 반면, 자유로운 보편적 교황직의 내적·도덕적 영향력을 증대할 수 있었다. 중세기의 한 신학자는 교황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교황이 세속사와 교황령을 포기하면 그는 정말 아버지(papa)로 불릴 것이고, 모든 이의 아버지요 교회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한편 다양한 나라들과 정교협정을 맺으며, ‘성모무염시태’ 신조를 선포하여(1854년) 신자들의 마리아신심을 증진시켰으며, 회칙 Quanta CuraSyllabus를 덧붙여 발표하여(1864년) 근대주의를 비판하였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를 통해 교황의 수위권무류성을 의결하고 선포하였다.

 비오 9세의 정치외교력은 당시의 복잡다단한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능력부족이었으나, 그는 교회 내적으로 영성과 교회의 엄격한 수도회의 부활, 反얀센주의 신심, 재속 성직자 수도자의 개혁, 교황의 자주와 독립의 확립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 비오 9세가 겪었던 파란만장한 사건들은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었을까?



  1. 참고도서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1998, 3777-3780. ; Francesco Chioraro/Gérard Bessière, 김주경 역, 교황의 역사-도시에서 세계로, 시공사, 1998, 95-102. ; 최석우 편저, 敎皇 그는 누구인가,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47-50. ; 전달수 엮음, 교황사, 가톨릭출판사, 1996, 326-330. ; August Franzen, 최석우 역, 세계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390-40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