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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그리스도인의 희망

  이 글은 창조종말론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종말신앙'[각주:1]이라는 책의 앞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신학방법론 수업시간 중에, 곽진상 신부님께서 신학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바로 이 글에서 나는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어찌 이리 명쾌하게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이래서 신학의 즐거움을 찾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언제나 조심해야 할 것은, 단지 지적 기쁨에만 만족하지 말고 실천으로 이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은 미래로 정향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물음은 곧 종말론적 최종미래에 대한 물음이 된다. 이 최종미래는 단편적으로 성취된 모든 것에 완성과 충만을 약속할 수 있으며, 만사를 포괄할 만큼 충만케 하는 미래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종말사건’에 대한 교리로써 미래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물음을 포착하여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희망의 복음으로써 이에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종말사건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메시지는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가? 재래의 종말표상 안에는 미래에 대한 물음의 해답이 과연 내포되었는가?

  전통적 종말론은 ‘종말적인 것’에 관한 성서적 상징과, 비유를 암시하는 편린들을 종말적 최종미래에 관한 정보로 이해하고 이를 종합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신학자 콩가르(Y. Congar)가 재래의 종말론을 ‘종말사건의 물리학’이라고 지적하듯이, 이러한 신학적 환상을 위한 시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그렇다면 종말에 관한 성서와 성전의 진술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종말’에 관한 성경 진술은 단순히 역사의 시간적 종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신앙체험으로부터 나와 이 체험을 희망하면서 미래에로 이어지는 진술이라고 기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사건’에 대한 진술은 희망의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신앙이 최종미래에 대한 물음의 대답을 비유로 나타낸 것은, 그것이 인격적인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엄연히 ‘인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관건은 인격적인 하느님이 인간의 미래이며, 또한 이 미래는 하느님의 미래이기 때문에 좋은 미래일 것이라는 희망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그리스도 신앙은 희망의 근거로서 희원하는 미래가 선취적으로 이미 당도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신앙은 최종적 의의를 가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포한다. 하느님의 완성된 종말적 최종미래가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구현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외견상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최종적 해답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의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희원하는 목표는 궁극적으로 부활한 주와의 일치이다. 그리스도 신앙에는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느님이 만사를 선하게 끝맺도록 이끄시리라는 희망이 있다.

  근세까지 실재는 대체로 차안과 피안의 도식으로 이해되었고, 그리스도교적 희망 역시 종말적 최종실재, 곧 피안을 향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미래 희망은 차안세계의 모든 차원에서의 조형 활동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신자가 차안세계를 등한시하는 사이에 반대로 비신자는 세상의 뒷일을 감당해내야만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만 최종미래를 설정하는 그리스도교적 미래와 세계의 미래에 대한 현대인의 물음 사이에는 외견상 극복할 수 없는 틈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피안의 미래와 인간이 조형하는 역사적 세계의 미래가 정말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가?

  새로운 신학기획들의 공통된 입장은, 피안미래에 대한 희망의 비유가 근본적으로 역사의 지양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망의 비유는 이 세계가 언젠가는 우리를 위한 고향이 되어 모든 인간적 동경이 완성되리라는 약속을 담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그 약속에 자신을 내맡기며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신으로 세계를 고향으로 만듦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도 이 차안세계로 향하고 있다. 이제 차안과 피안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적 도식으로 이해된다. 종말적 최종미래는 이 역사 속에서, 인간들의 투신을 통하여 생겨나게 될 무엇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 신앙은 ‘천국에 고향을’ 세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예수의 부활에 근거를 두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아무 것도 배제하지 않는 포괄적인 희망이다. 이러한 약속이 과연 역사의 진보 안에서 채워질 수 있는가? 그러나 칼 바르트의 논평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진보에 쉽게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직 하느님한테서의 ‘피안적’ 희망을 정립할 때에만, ‘무의미의 체험’과 ‘기능세계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빛 속에 그 희망을 세울 수 있다. 곧 하느님을 통한 이 종말적 최종완성의 희망에 해방적인 복음의 힘이 근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종말론적 유보’-하느님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는 절대적 가치를 찾을 수 없음-의 삶을 통해 이 세상에 맞도록 사람을 해방시킨다.

  이상의 고찰과도 같이, 하느님에게서의 미래희망은 역사적 책임을 지고 오히려 세계 안에서 세계를 위해, 이치에 맞도록 인내하며 책임있는 행동을 하는 자유를 부여한다. 이렇게 투신하는 차안희망 속에 피안희망의 성령이 이미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오로지 일상의 작은 소망을 알고 이 희망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만이 커다란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최후의 거대한 희망을 위해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차안과 피안은 분리된 두 영역이 아니라, 불가분의 교환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다. 도래하는 하느님의 미래를 참고 기다리는 지금 여기에서만,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올바로 이해될 것이다.

  1. G. 그레사케, "종말신앙", 심상태 역, 성바오로출판사, 1980 [본문으로]